김진호님(단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 미⋅중 패권 경쟁 시기 한국의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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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5-04-22 12:33 조회8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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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한반도와 중국 중원 왕조 관계는 수천 년 동안 지속되었다. 기원전 2세기 한나라가 고조선을 정복하고 ‘한사군’을 설치하며 중국 중원 세력의 영향력이 한반도에 미치기 시작했고, 7세기 당나라와 신라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것과 원나라와 청나라 때 이들의 침략도 양 지역의 국제관계였으며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대의 파병도 이와 같았다.
즉, 명·청 시대 중원 세력과 한반도는 ‘조공 관계’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1894~1895년 ‘청일전쟁’으로 청나라의 한반도 주변 영향력은 약화하였고, 1910년 한국은 일본에 강점되었다. 이 일제 강점기 동안 한국은 중국과 세계 여러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추진하며 일본에 대항했는데, 한국 독립운동 세력과 중국을 포함한 여러 지역 세력과 협력도 추진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부터 한국에는 미국의 영향력이 커지기 시작했고, 이후 남북으로 나뉜 한반도에서 중국(중공)은 사회주의 진영 북한(조선)을 지원하다가, 중국이 1950~1953년 한국전쟁 당시 ‘인민지원군’ 형식으로 참전해 북한을 지원하면서 한국과 중국의 관계는 당시 국제환경과 같은 ‘냉전’을 유지하게 됐다.
이러한
긴장 관계는 1983년 중국 민항기가
피랍되어 한국으로 들어오면서 교류의 물꼬가 트였다. 이후 1992년 한국은 아시아에서
마지막으로 중국과 수교하는 국가가 되었고, 한⋅중 수교로 양국 경제
협력은 본격화했다. 한⋅중 관계는 마찰을 일으키면서도 협력의 기조를 유지했다. 그러나 2010년대 초부터 미국의
중국에 대한 정책이 ‘관여’로 시작하여 ‘봉쇄’로 발전하면서 한⋅미 동맹이 강화되고
한⋅중 관계는 여러 도전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한반도에 미군 전략무기 ‘사드’의 배치와 중국의 한국에 대한 경제, 문화적 보복이다.
한국과 미국의 관계는 19세기 후반부터 시작되었다. 1882년 조선과 미국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며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수립했고, 미국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을 끝내며 한반도 38선 이남을 차지해 군정을 실시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미국은 이를 공식적으로 승인하며 군사·경제적 지원을 제공하여 민주주의 체제 수립을 위해 많은 지원을 했다. 그리고 1950~1953년 한국전쟁 동안 미국은 유엔군을 조직해 참전했고, 전쟁 후 1953년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주한미군이 주둔하게 되었다.
이후 1970~1980년대 한국은 미국 경제 원조 및 한국의 정책과 국민의 근면함으로 경제가 성장하면서 한⋅미 관계는 더욱 강화되었으며 2007년에는 ‘한미자유무역협정(FTA)’이 체결되었다. 현재 ‘한미동맹’은 군사만 아니라 경제, 외교, 기술 협력으로 확대되고 있다. 이러한 한⋅미 관계와 미국의 신자유주의 정책은 한국과 중국이 수교하는 시대적 환경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미⋅중 관계는 1971년 ‘핑퐁외교’라는 당시 국제정세에 필요했던 미⋅중의 전략적 필요와 협력으로 교류가 시작되었고, 양국은 1979년 정식으로 수교하게 되었다. 이 시기 중국은 마오쩌둥의 사망과 등소평의 집권으로 1978년 중국의 역사적 변혁인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하며 세계 여러 국가와 교류를 본격화했는데, 이 ‘개혁·개방 정책’은 1989년 ‘톈안먼 사건’의 고비도 넘기며 2001년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는 쾌거도 이룬다. 그러나 이러한 중국 발전의 큰 산을 넘는 배경에는 미국의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이 있었다. 장쩌민, 후진타오 시대는 덩샤오핑 시대의 연장으로 적극적인 대외 진출을 추진했는데, 이러한 흐름은 미국이 구소련 해체 후 국제 정치에서 무역과 투자를 위주로 한 신자유주의 시대의 협력과 분업 분위기를 유지했기 때문이고, 미국의 정계와 재계가 중국 개방으로 민주사회로 변화를 꿈꿨다는 ‘장밋빛 꿈’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신자유주의 국제무역은 미⋅중 관계 그리고 한⋅중 관계에도 도움이 되었던 미국이 주도한 국제사회의 조류였다.
개혁⋅개방 시기 중국은 제조와 수출을 통해 경제 발전과 국제사회에서 영향이 증가했는데, 이는 중국 공산당이 경제와 행정적으로 그 영향력을 더 확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변화한 중국 공산당은 차츰 세계에서 회원 수가 가장 많고, 가장 많은 자금과 권력을 가진 거대한 조직으로 변모했다.
중국은 공산당이 군대와 국가를 이끄는 ‘당-군-정 체제’를 유지하기에 국가수반은 당과 군을 통해 행정과 국가 안보를 포함한 모든 전략을 총괄한다. 미국과 중국의 교류에 변화가 생기는 것은 중국 경제력이 커지며, 군사력과 대외 영향력이 증가하며 미국에 영향을 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의 무역 적자와 중국의 해양 영토에 대한 확장 및 국제사회 영향력 증가는 미국 국내 경제 환경의 악화와 맞물리며 미국의 중국에 대한 인식과 정책을 변화시켰다.
2010년대 이후 미⋅중 관계는 마찰과 대립으로 변화하며 국제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오바마, 트럼프, 바이든, 트럼프 2기를 거치며 미국이 동맹과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을 통해 중국을 제재하고 봉쇄하는 전략이 더욱 강화되었다.
미⋅중 관계의 변화와 ‘국제 안보’와 ‘글로벌 공급망’이라는 정보와 국방 그리고 경제라는 측면에서 양국이 대립하는 양상이 만들어졌으며, 무역, 물류, 금융, 에너지, 자원, 군사력 및 과학 기술을 포함한 모든 영역에서 세계에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복잡한 시기 한반도에 있는 대한민국은 “한반도 평화를 어떻게 유지하며, 동맹구조를 기초로 미국과 일본의 관계를 어떻게 이끌며 중국 및 러시아와 평화적으로 교류해야 하느냐는 과제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시기 제일 중요한 것은 국내 경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실리 ‘국익 외교’일 것이다.
경제적 이익을 기초로 안보 보장을 위한 대외협상이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과정에 우리는 미국의 대동북아 역내 정책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고, 중국이 이러한 국제정세에서 자국이 원하는 요구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일본, 북한, 러시아 등 역내 국가들의 국제정세에 대한 종합적 판단을 한국의 국익과 연계해 분석하는 능력도 필요할 것이다.
모든 정책적 판단과 행위가 역내 역학 구조에서 국가 이익에 기초한 정책 결정으로 이어져야 한다. “시시각각 변화는 국제정세에서 ‘의리와 체면’보다는 ‘실리’가 우선시되는 정책의 유연한 대응이 필요하다고 본다.” 또한, 중국의 ‘역린’인 대만해협 문제와 동북아의 안보 위협인 ‘북한 문제’는 미국과 중국의 관심이 높은 ‘전략적 레버리지’이거나 ‘핵심 이익’에 해당하기에 양국의 이에 대한 정세 판단을 기초로 “때로는 수동적으로, 때로는 능동적으로 ‘스윙 전략’을 사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무역 면에서 미국과 중국의 대립은 기업과 국가 경쟁력과 직접적인 연관관계가 있기에 이것도 국제 금융과 무역 상황 및 관련 행위자들의 정책을 분석하며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 단기와 중기 그리고 장기적 유연성과 연관성에 기초한 전략 설계가 필요하다. 그리고 안보적인 문제에서도 ‘경제 이익’과 ‘안보 이익’의 대차대조표를 사용하며 안보를 유지하되 경제적 손실이 없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남이 요구하는 내용을 파악하며 협상과 거래가 이뤄지게 해야 한다.”라는 현실적 정책 결정이다.
올해 한국은 10월에 APEC 회의를 주최하기에, 이 시기 적절한 역내 환경과 글로벌 정책에 관한 어젠다(Agenda)를 발표하며 균형 있는 한국 외교의 ‘외유내강’을 보이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그 안에는 한국과 한국인의 ‘실리’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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